수도권 계통 포화 속 ‘지자체 주도 PPA’ 주목市가 생산·계약·공급까지 맡는 전국 최초 모델160원대 고정단가로 중소기업 RE100 돌파구지방정부가 에너지 시스템 설계하는 첫 신호탄
“에너지는 중앙정부의 몫”이라는 통념이 깨지고 있다. 기후위기, 계통 포화, 전력시장 불확실성이 겹친 가운데 지방정부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도권처럼 전력 소비가 집중되는 지역일수록, 자체 공급망을 갖추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특히 수도권처럼 전력소비가 많은 지역일수록 자체 공급망을 갖춘다는 것은 생존 전략에 가깝다.
그 변화의 선두에 경기도 파주시가 있다. ‘파주형 공공재생에너지’는 전국 최초로 지방정부가 태양광으로 전력을 생산해 시민과 중소기업에 장기 고정가격으로 직접 공급하는 모델이다. 계통 포화에 직면한 국내 전력시장에서 공공재생에너지는 유휴부지를 활용한 발전소 건설과 지방공기업을 통한 공급망 설계라는 장점을 안고 있다. 더욱이 전력중개업체가 아닌 지자체가 발전소 인허가부터 판매까지 직접 유통구조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파주시의 전력 자립률은 140%에 달하지만 분산화율은 2%에 그치면서 에너지전환이 당면과제로 부상한 상태다. 관내 5000여 개의 기업 중 10% 이상이 수출기업이고, 특히 다수 비중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재생에너지 수급은 시급한 과제다.
정지선 파주시 기업지원과 RE100지원팀장은 지난 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계통 포화와 수도권 입지 규제, 민간의 소극성까지 겹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공공주도 RE100 모델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보고 있다”며 “도농복합도시인 파주에서 지방정부가 나서 시민과 농민, 기업 모두가 에너지 프로슈머로 참여하고 ‘기본에너지’를 공공이 보장하는 구조를 함께 실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공이 직접 전기를 만든다…‘지자체형 PPA’ 첫걸음
2026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한 1.2MW 규모 문산정수장 태양광발전소는 파주시가 추진하는 ‘공공재생에너지 1호기’다.
단순 설치가 아니라 유통과 소비까지 포함한 통합 시스템이 특징이다. 파주도시관광공사가 설비를 설치·운영하고 파주시 기업지원과 RE100지원팀이 직접 관내 기업을 모집해 전력거래계약(PPA)을 체결한다. 160원/kWh의 경쟁력 있는 고정가격으로 파주시내 대·중·소기업 9곳에 30년간 장기 공급하는 구조다.
정 팀장은 “지금은 작은 규모로 시작하지만 전기요금 오름세에서 장기간 안정적인 가격으로 제공 가능하고, 계약이 끝나면 새 발전소로 연결하는 방식이라 기업 입장에서는 안정성이 높다는 반응”이라고 말했다.
관내 기업 입장에서 지방정부가 고정단가를 제시하고 전력공급의 안정성까지 보장하는 구조는 새롭다. 전기 수요를 ‘위탁’하고 써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함께 설계하고 참여해 최적의 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 파주시 소재 기업 중 다수가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체인 만큼, 이러한 시의 행보는 ESG 대응과 RE100 이행과도 직결된다. 전기요금 절감뿐 아니라 기업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전략적 자산인 셈이다.
강희환 RE100지원팀 주무관은 “점차 기업들 사이에서 반향이 일고 있다”며 “실제 수요기업은 물론 재생에너지전력중개사업자, 기술·데이터 파트너도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파주는 문산정수장을 포함해 내년까지 총 5MW 규모, 100억원을 투입하는 발전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2029년까지 누적 14MW의 공공태양광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도로사면, 유휴부지에서 확장해 공공건물과 소규모 유휴필지, 군 반환지 등 신규 부지도 발굴 중에 있다. 조례 개정을 통해 공익사업 시 이격거리 기준을 완화해 유연한 부지 확보도 가능해졌다. 단편적인 공급 확대에 그치지 않고 시가 직접 AI를 통해 수급관리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 ‘기본에너지’ 실험으로 시민에게 전기 선택권 제공
파주형 RE100 사업은 단순한 기업 지원을 넘어서 시민 대상 복지정책으로 확장하고 있다. 요금지원이나 설치지원 중심의 전통적 복지 프레임과 구분되는 ‘기본에너지’ 개념을 토대로 진행되고 있다. 시민이 자신의 전력 소비를 이해하고, 필요에 따라 전기 유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대표 사업이 ‘소상공인 에너지 컨설팅’이다. 전문 인력이 가구·매장을 직접 방문하고, 에어컨 교체, 계약전력 조정, 누진 구간 분석 등 실효성 있는 개선안을 제시하는 ‘에너지 건강검진’이다. 누적 300여개 업소가 참여했고, 전기요금 인하뿐 아니라 전기 사용에 대한 시민 인식 변화도 이끌어냈다.
강 주무관은 “지난해 방문한 한 음식점은 오래된 벽걸이 에어컨을 고효율 기기로 교체하고, 계약전력도 실사용 패턴에 맞춰 조정했더니 연간 100만원의 전기요금 절감을 이뤘다”며 “단순 절약을 넘어 우리 가게의 전기 사용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정 팀장은 “이윤을 남기려는 구조가 아니라 공공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시민에게 실질적인 선택권을 주고 싶다”며 “시민이 전기 생산과 소비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도는 RE100 교육 콘텐츠다. 파주시는 아동용 책자, 캐릭터, 시민강사 제도를 모두 자체 개발했다. ‘에너지벤져스’라는 캐릭터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재생에너지를 소개한다. 올해 처음 선발한 8명의 시민강사는 다가오는 10월부터 지역 학교와 마을 교육현장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태양광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줄이고 시민들이 에너지 소비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다.
공공재생에너지에서 시작한 사업은 장기적으로 시민 대상 전기요금 선택권 확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단순한 할인 안내를 넘어, 공공주도 전력소매 구조와 맞물려 추진한다. 특히, 대기업 중심의 산업용 전력공급 모델과는 선을 긋고 ‘3kW 이하의 주택용 전기’와 시민 참여형 재생에너지망을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는 구상이다.
◆"마을 단위 전기시장으로 에너지 주권 회복"
다만 파주시가 추진 중인 오프사이트 PPA 방식은 아직 제도적으로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현재 전기사업법상 오프사이트 PPA를 하려면 발전소 용량이 1000kW 이상이어야 하고, 전력을 구매하는 기업도 상당한 규모의 전력 사용량을 갖춰야 한다. 이 기준은 사실상 대기업을 염두에 둔 구조다.[집중기획] 파주시, “공공 주도 RE100 모델 우리가 먼저 만든다” - https://www.ele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57601
하지만 파주 지역에는 계약전력이 100kW 수준인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이고, 면 단위 마을에 흩어져 있어 성사가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는 1000kW급 발전소 하나가 여러 소규모 기업에 전력을 나눠주는 구조(1:N)가 더 적합하지만, 이마저도 현 제도에서는 명확히 허용되지 않는다.
이 같은 제도적 한계를 넘기 위해 파주시는 ‘마을전기’ 모델을 병행 구상하고 있다. 마을이 직접 발전소를 보유하고 해당 발전소에서 기업에 전기를 공급하는 구조다. 주민협동조합이 주체가 되고 발전수익 일부는 마을 소득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모델이 자리 잡으면 마을로선 기업이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에너지 고객’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시 소재 대형 발전소로 인한 발전소주변지역지원기금 활용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공공수익을 공공재생에너지로 선순환하면서 마을 단위의 ‘지산지소’를 구현하는 현실적인 대안 중 하나다.